농촌시장인 장시가 처음 등장하였던 것은 15세기 말이었다. 그 이전에도 지방에 시장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고려시대에도 부정기적으로 주현시(주와 현의 시장)가 열리고 있었다. 송나라 사람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한낮에 상하 모든 계층이 관아 주변에 모여 물건을 교역하였다고 한다.
15세기 말에 등장한 장시는 이로부터 발달하여 한단계 진전된 유통기구였다. 이는 장시 출현 당시의 사정이나 장시의 특징을 살펴보면 분명하다.

15세기 말 전라도 무안, 나주 등지의 사람들은 큰 흉년을 맞아 스스로 한달에 두 번 읍내 거리에 시장을 열고 필요한 물건을 교역하면서 이를 장문(場門)이라 불렀다.
교환을 통해 흉년을 이겨내려고 했던 것이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중에 충청도 임천에 피난하였던 오희문이라는 양반이 포목으로 쌀과 보리를 바꾸거나 떡을 찌고 술을 빚어 장시에 내다 팔아서 생계에 보태려 했던 것을 보면 애초에 흉년을 당해 장시를 열었던 사람들의 활동도 이러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필요한 것'을 교환하여 생계를 도모하는 수준에서 출발한 시장이었다.

하지만 흉년에 이러한 활동이 가능하였던 이유는 다양한 산물이 풍부히 생산되고 생산자들이 이를 비교적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널찍히 펼쳐진 나주평야를 끼고 서해안과 인접하여 곡물과 해산물이 풍부한 지역이었던 전라도 나주 무안 지역에서 제일 먼저 장이 섰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또한 15세기 후반은 왜구의 침입으로 황폐해졌던 해안지역의 농토 개간이 완료되고, 농업생산력이 현저히 발달한 시점이기도 하였다.

장시에서 물건을 매매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농민과 수공업자등 직접생산자였다.
이들은 원거리를 돌아다니는 행상을 통하는 것보다, 장시에서 낮은 가격에 구매하고 높은 가격에 판매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장시는 몇 개 촌락의 주민이 하루에 왕복하여 교역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에 30-40리의 거리를 두고 확산되었다.
사용되는 교환수단 역시 소규모 거래에 알맞은 사용할 수 없는 거친 면포나 곡물이었고, 뒤에 가서는 소액 화폐인 동전이었다. 이런 까닭에 장시는 상설시장화하지 않고 정기시장으로 존속되었다.
장시의 주된 이용자가 직접생산자였고 여기에서 매매되는 주요 상품이 곡물과 직물 및 각종 수공업제품이었기 때문에 생산자에게는 제품을 만들 시간이 필요하였고, 수요자도 이를 매일 구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장시는 설치장소, 교환수단, 개장일시 등 모든 면에서 농민, 수공업자등 직접생산자의 이해관계에 기반한 시장기구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농촌현실과 직접생산자층의 이해에 깊이 관련되어 장이 서게 되자, 그 이전부터 농촌을 돌아다니던 행상들의 활동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여전히 가가호호를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점차 장시의 순회에 생계를 의지하게 되었고, 종전처럼 유통과정에서 큰 이익을 노릴 수는 없었지만, 정기적으로 일정한 장소에서 구매자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행상의 수도 상업 이익을 노리는 자들과 정부의 조세 징수, 지주층의 토지 겸병 때문에 토지에서 밀려난 농민들의 합류로 더욱 늘어갔다.

15세기 후반 처음 모습을 보인 장시는 점차 삼남 전지역과 경기도 등지로 확산되었고, 애초 출현할 당시 15일이나 10일 간격이었던 개시일도 점차 5일 간격으로 조정되었다.
16세기 중엽 명종대에는 지방 군현에서 날짜를 달리하여 번갈아 장시가 서는 경우가 있어 도적이 들끓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장시 금지 지역인 경기도에 장시가 많이 설치되어서 서울로 물건이 유입되지 않는다고 과장하는 관료도 있었다.
정부에서도 장시 확산과 상업 발달에 따른 사회 문제의 발생과 기존 유통망의 동요를 우려할 정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장시 확산 추세는 17세기말, 18세기 초 이후에 더욱 두드러졌다. 종래에는 관아나 군사적 요지를 중심으로 시장이 개설되었던 반면, 이제는 산간지역에서도 장이 서게 되었다.
당초 장시를 금지했던 정부도 점차 장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확산을 억제하다가, 결국은 백성을 모으는 방편으로 장시를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화전민이 산간지역을 개발하여 산촌이 발달하는 등 인구 확산이 두드러졌던 것도 장시가 확산되는 한 배경이었다.
이 결과 18세기 중반에는 이미 전국의 장시 수효가 1,000여곳에 달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장시 상호간의 관계도 변화하였다.
우선 인접한 장시들의 개시일자가 조정되고 있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모시 산지로 유명하였던 충청도 홍산, 임천, 한산, 비인, 남포의 장시는 2일 7일, 5일 10일, 1일 6일, 3일 8일, 4일 9일에 열리고 있었다.
각 고을만 보면 여전히 5일 간격의 정기시만이 열렸지만 이들 지역 전체로 보면 매일 장시가 열렸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농민은 바쁜 농사철에도 짧은 거리만 가면 장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더욱 이익을 본 사람은 장시를 돌아다니던 행상이었다.
이들은 하루 왕복거리를 두고 날짜를 달리하여 열리는 장시들을 차례로 돌아다니면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장시마다의 교통사정이나 수요의 크기에 따라 변동 양상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예를 들어 장시들이 조밀하게 분포하였던 영남 호남 지방의 경우 18세기 말 이후에도 벽지나 중소읍에서는 여전히 새로운 장시가 등장하여 장시망이 확대되었다.
교통과 행정의 중심지였던 큰 읍에서는 대규모의 장시가 서서 인접 장시들이 폐지되거나 서는 날짜를 바꾸게 되었다.
대규모의 장시는 소규모 장시에 나오는 산물을 모으고 외부의 상품을 배급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장시의 숫자는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20세기까지 1,000여곳 안팎으로 그다지 변하지 않았으나 실상은 이렇듯 대규모의 장시를 중심으로 시장권이 조정되는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금강 어귀에서 부여 등 배후 평야지대의 곡물을 모으고 해산물을 공급하였던 은진 강경포나, 동해안의 어물, 목재와 삼남의 곡물이 모여들었던 덕원 원산포를 비롯 경기도 광주 사평장, 송파장, 안성 읍내장, 교하 공릉장, 충청도 직산 덕평장, 전라도 전주 읍내장, 평안도 박천 진두장 등은 이룬 상황 속에서 발전한 대규모의 장시였다


[출처 : 한국사(한길사), 한국사(국사편찬위원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청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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