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민속장
 
 


 지친다리 서로 보듬고 2003-03-25 11:30:00

 
67년부터 객지생활을 시작했던 방랑벽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타고난 팔자가 역마살이 끼어서인지 좌우간 한 곳에 오래 정착을 하지 못했다. 농사짓는 일은 왜 그리도 적성에 맞지 않던지 이곳저곳 많이 떠도는 편이었다.
80년대 초 시골 고향인 충남 부여의 땅마지기를 팔아서 서울로 올라왔다. 용산 농산물 도매상가 4진 2공구에서 먼저 상경해 자리잡은 친구와 후배의 도움으로 장사 길에 들어섰다. 차츰 주위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동업으로 농산물 위탁업을 시작해 그런 대로 자리가 잡혀갔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던가, 용산 농산물 도매시장이 가락동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혼잡과 무질서, 시행착오 등으로 장사가 어려워지고 형편마저도 힘들어졌다. 게다가 동업자까지 돈을 갖고 사라지는 바람에 장사를 정리하고 성남으로 이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동업자의 배반, 술로 보낸 세월
당시 나는 사업실패보다도 믿었던 동업자의 배반에 큰 상처를 입었다. 날마나 술로 세월을 보내는, 글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비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생활이 그쯤 되자 항상 말없이 지켜보던 처가 파출부로 생활비를 조달했고 하루 종일 죽도록 남의 집 일하고 몇 천원 받아들고 온 그 돈 중 천원, 2천원을 내게 쥐어주었다. 술을 먹더라도 밥은 굶지 말고 꼭 사먹으라고 했다. 처가 주던 돈은 고주망태가 되어 내 자신을 잊어버리려는 술값에도 부족했으니 그 인고의 세월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런 세월의 연속이던 어느 날 처가 만원짜리 지폐 2장을 터억 내주며 "여보 순식이 아빠, 앞으로 술만 그렇게 먹고 인사불성이 되어 다니지 말고 그 동안 남에게 얻어먹은 술 대신 점심이라도 대접하고 오세요."
순간 기만원에서부터 많게는 기백만원까지도 뒹굴어 다녀서 계속 주인 아주머니에게 돌려드리곤 했다는 처의 이야기가 얼핏 생각났다.
나의 첫 마디는 "혹시 당신…"이었다. 처는 도리질을 하며 절대 남의 돈에는 십 원 짜리 한 장 욕심내지 않는다고 강하게 나오면서도 돈의 출처를 밝히기를 꺼렸다. 며칠 동안 추궁해 알아낸 일이 곧 오늘의 내가 모란 민속시장에서 일하게 된 동기였으니 전화위복이랄까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서울에서 성남으로 이사 간 집 이웃에 모란 재래시장과 지방 5일장을 다니며 가축장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살고 있었다. 몇 개월 간 새로 이사온 우리 부부를 관심있게 지켜봤단다. 남편이란 작자는 뚜렷한 직장도 없는 것 같은데 매일 나가서 고주망태가 되어서 돌와오고 그나마 젊은 마누라가 파출부라도 나가서 살림을 꾸려가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고 안타까웠단다.
여자 혼자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안 되었던지 그 아주머니가 하루는 처를 불러 이것저것 자초지종을 물어보더란다. 그래서 과거지사를 이야기하고 요즈음엔 남편의 방황 때문에 파출부를 다닌하고 하니까 하루 파출부 수입이 얼마나 되느냐고 재확인하고는 1일 4∼5천 원이라고 하니까 그러면 파출부를 그만두고 자기 장사하는 것을 배우지 않겠느냐고 하더란다. 처가 그 장사를 배우면 얼마나 수입이 되느냐고 묻자 다음 모란장날 모란 어디어디로 누구 엄마 물어서 찾아오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니까 일단 생각이 있으면 장날 자기를 찾아오라고 하더란다.
처는 부푼 꿈에 젖어 장날을 학수고대한 모양이다. 다음 모란장날 아침 일찍 모란장으로 그 아주머니를 찾아갔고 그 아주머니는 반색을 하며 친절히 맞아주고 강아지를 주면서 옆에 가서 얼마에 팔아오라고 시키더라는 것이다. 그 아주머니 시키는 데로 팔아오면 1마리 당 2,000원에서 5,000원까지 나누어 주고 심지어 강아지 가격을 잘 받은 것 같으면 10,000원짜리도 집어주어 하루 장만 장사해도 20,000원∼50,000원 수입이 되니 파출부 수입에 비하면 편하면서도 얼마나 큰 수입이던가.

모란시장에서 가축 장사를 시작하다
처는 그 장사에 푹 빠져 가지고 나 몰래 몇 장이나 계속 그 장에 다니게 되었다. 나 또한 처의 설득으로 술을 끊고 처와 같이 5일장을 다니며 가축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엔 도저히 못할 것 같았다. 특히나 우리 고향 부여에서는 강아지를 팔지 않고 이웃에 한 마리씩 나누어 주었다. 나중에 그 집에서도 새끼를 낳으면 한 마리 가져오고 하는 것을 상식처럼 보아오던 터라 어색하기만 했다.
또 모란장날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가락시장이 가깝다는 점이었다.
가락시장에서 같이 장사하던 친구들이 육견이나 토끼, 닭 같은 것을 사서 잡아먹으려고 오는 경우가 있었다. 종종 마주칠 때의 그 당혹감, 그들은 "여기서 무얼 해? 요즘 시장에서도 잘 안보이고? 하면서 물었다.
나는 "응! 무얼 좀 사러 나왔는데, 내일부터는 나갈게"라고 얼버무리며 궁색한 병명으로 들러대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 부자연스러움은 실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각설하고 장사하는 것이 다 그렇듯이 생각대로 잘되고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하루는 일산장을 가기 위해 새벽 4시부터 준비해 6시쯤 성남시 복정동에서 시내버스를 탔는데 양재동쯤 가자 박스에 담은 강아지가 갑자기 낑낑거리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등에서 진땀이 나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간은 콩알만해지는데 아니나 다를까 버스운전기사가 룸미러로 뒤를 한번 돌아보더니 "아침부터 재수없이 강아지를 실은 사람이 누구야? 빨리 내리시오"하면서 차를 세워 쫓기듯 하차했다.
처는 내리자마자 박스를 부지런히 풀어서 강아지들을 인도에 내놓았다. 알고 보니 강아지들이 볼일을 보고 싶으면 그렇게 끙끙거리는 거였다. 볼일이 끝난 강아지들을 다시 박스에 담아 다음 차로 무사히 일산장에 갈 수가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당시 출근하던 구경꾼들하며 차에서 쫓기듯 하차할 때 뒤통수에 느껴지던 따가운 눈총들.
사실 애완견에 대한 상식이 지금은 상당히 보편화되어 강아지 안고 버스타는 것은 물론 백화점 쇼핑 가는 것 등이 생활화되었지만 15년 전에는 개를 가지고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기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었다.

드디어 화물자동차를 사다
그 날 이후 우리는 지방장에서 강아지들을 싸게 구입해도 밑지지 않는 한 현장에서 팔고 웬만해서는 집으로 가져오질 못했다. 집에 가져와서 잘 거두었다가 모란장에 내다 팔면 더 많은 이익이 눈에 보이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운전면허증을 취득해 화물자동차를 한 대 사는 것이 당시 지상최대의 목표였다. 드디어 1989년 1종 보통면허를 취득했다. 면허증을 발급 받자마자 장안평에 가서 중고화물자동차를 한 대 구입했다. 집 없는 사람이 집 장만한 것보다 더 감격스럽고 흥분되었다. 가락시장에서 배신한 동업자, 그리고 외상으로 물건 가져가고 피해 다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다 매일 화술만 퍼먹고 다니던 신세에서 비록 화물자동차지만 내 손으로 운전하는 자동차까지 구입했다는 것이 당시 나로서는 엄청난 발전이요 뉴스였다.

나는 모란장에 들어오기 전에 나를 배반하고 돈 떼먹은 동업자의 고향집에까지 찾아 갔었다. 그의 부모형제를 다 만나보고 내 손해본 금액으로 시골 땅 팔아온 만큼이라도 갚으라고 요구했지만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다. 고소를 해서 잡아넣던지 돈을 받아가던지 마음대로 하라고 답하는 부모형제들. 아마 그 친구도 집에서 상당히 신용을 잃고 있었다는 걸 느꼇다. 허탈한 마음으로 상경해 어쩔 수 없이 법적 절차로 우선 고소장부터 작성했었다.
그 날 밤 처는 "만약 그 사람이 붙잡혀 구속되게 된다면 그 젊은 사람이(동업자는 당시 총각이었음) 전과자가 되어 앞길이 탁 막히는 것인데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도 자식이 셋이나 되는데 앞으로 우리 자식들도 그런 일이 있게 될지 누가 안답니까. 지가 돈벌면 우리 땅판 돈이나 해오겠지요. 여보! 우리 이 고소장 찢어버립시다" 했다. 나는 처의 말이 너무 고마웠다. 우리 가족을 5만원 짜리 사글세 방으로 내 몰리게 했지만 한때는 형님 동생하면서 동업까지 했던 후배를 고소까지 하려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 그 자리에서 고소장을 찢어버렸다.

장사에 실패한 후 겪었던 일을 돌이켜 볼 때마다 그때 그래도 우리가 마음을 넓게 써서 그 복으로 우리가 자동차도 장만하고 장사가 잘되는구나 하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밝고 꿋꿋하게 자라준 아이들
또 고마운 것은 서울 넓은 집에 살다 거지가 되다시피 알몸으로 성남의 단칸방으로 이사를 왔어도 기죽지 않은 아이들이다. 이웃에 사는 어른들 볼 때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인사를 잘한다고 어떻게 그렇게 가정 교육을 잘 시킬 수 있느냐는 칭찬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겸손한 대답을 하면서도 입이 쩌억 찢어져 귀에 걸리는 것 같은 느낌은 웬일인가!
큰 놈이 초등학교 때 반장이나 우등상을 빼놓지 않고 받아오더니 중학교에 가서도 계속되었고, 장학금을 받아 큰 돈 안들이고 고등학교엘 다녔다. 둘쨰 놈도 이에 질세라 초등학교 때 전교 어린이 회장을 맡더니 중학교에 가서도 반장을 맡아놓고 하는 것 아닌가. 학부모 상담 때 교무실로 담임선생님을 한번 찾아가니 다른 반 선생님들이 "민식이 때문에 담임선생이 놀고 먹는 팔자가 되었다"며 "웬 아이가 그렇게 리더쉽과 보스기질이 있느냐"고 추켜 세워준다. 남의 집 셋방살이에 힘든 삶이었지만 어깨가 떠억 벌어지는 것 같고 목이 갑자기 뻣뻣해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막내딸은 성적이 좀 뒤져 상고에 진학했는데 그것도 이 아비의 짐을 덜어준 꼴이 되었다. 아무튼 세 놈이 모두 그 예민하던 사춘기를 무사히 넘겨줘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화물차를 운행하면서 지방장을 다니니까 편하기만 한 게 아니라 장사도 잘 되었다. 지방장에서 못 판 강아지는 성남에 가져다 비싸게 팔 수 있었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할 땐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큰 개 육견이나 닭, 오리, 칠면조 같은 가금류도 거래할 수 있었다.
차가 없을 때는 차있는 장사꾼에게 손님을 뺏기기도 했는데 배달도 해주니 손님도 늘었다. 또 강아지 전문 사육장에 가면 10여 마리까지는 가능하지만 2∼30마리가 되면 운반을 못해 그냥 돌아가던 어려움도 일거에 해소되었다. 많이 팔릴 때는 하루 100만원씩 버는 날도 있었고 그런 날은 점심을 굶어도 배고픈 줄 몰랐다.
처까지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장거리 운행이나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운전하게 되는 날은 교대로 운전을 하니까 편하기도 하고 그 행복감이 깨질까봐 여간 조바심이 나는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 조바심이 살살 현실화되고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모란장 상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부서장직을 맡게 된 것이다. 부서장이란 모란장의 특성으로 화훼, 잡곡, 약소, 의류, 신발, 잡화, 생선, 야채과일, 음식, 고추, 애견, 가금, 마늘, 기타 등 13개 부서로 구분되는데 부서마다 부서장을 두어 수금이나 상인회 전반에 걸친 업무의 조율 및 대행을 하는 자리이다. 처음에는 상인회 운영이 잘 되는 듯 하더니 정도를 벗어난 운영체제가 돼가고 있었다.
그냥 외면하고 장사에만 전념했다면 오늘날 집도 장만하고 남의 집 셋방에서 벗어났을 텐데 그때만해도 불의를 보면 참질 못했다. 민주주의란 밑에서부터 여론이 모여 위로 전달되는 것을 원칙으로 알고 있던 나는 상명하복식의 힘을 앞세운 운영체제에 반발했다.
1년여에 걸쳐 집행부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갖은 협박과 공갈, 회유 등이 들어왔으나 나를 믿고 따르는 회원이 1,000여명에 이른다는 자신감으로 굴하지 않고 투쟁해 승리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그때 믿고 따라준 임원 및 회원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그 싸움 이후 1993년 12월 3일, 나는 후배와 함께 모란장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다른 사업에 투자를 했다. 영풍유통, 성남시 노래방 협회와 계약해 노래방에 음료수와 기계를 애프터서비스 하는 사업이었다. 5,000만원을 투자해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시장 임원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모란시장 상인회장직을 맡아 달라는 것이다. 내가 떠나온 이후 내분이 생기고 새로운 회장직을 서로 하려는 등 매우 복잡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모란시장 상인회 회장이 되어
나는 모란 재래시장이 생긴 이래 회원이 직접 투표에 참여해 선출된 초대회장이 되었고 지금까지 3대째 연임하고 있다. 회원들에게 충실한 심부름꾼 역할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열심히 뛰고 있다.
상인이 주인이며 스스로 질서를 지키며 법을 준수하는 자율적인 모란시장 상인회를 표방하며 운영해온 지난 8년. 그 중에서도 몇 가지 뜻 있는 일은 상인회 전체가 참여하는 체육대회를 7회나 치렀고, 1,000여 상인들의 의견이 묵살된 채 일방적으로 모란장을 이전시키려는 지방자치단체의 압력과 탄압에 굴하지 않고 상인 전체가 똘똘 뭉쳐 현 위치 사수라는 기치로 투쟁해 회원들의 상권을 지켰다.

또 백범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 투척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60만원이라는 거금의 현상금 수배자가 되어 피신했던 가흥시 해염현에 피난 중 조국의 백년대계를 설계하며 사색하시던 영단정이라는 정자가 70여 년 간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어 폐허가 됐다는 소식에 상인들이 3년여에 걸쳐 뜻을 모아 복원기금을 마련해 전달하고 지난 4월 그 낙성식에 참석했다. 평생 두고두고 잊지 못할 일이며, 그 일이 가진 자가 이룬 것이 아니고 노점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서민들이 앞장서고 성남 시민들이 호응해준 일이기에 더욱 값지다.
낙성식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로 나라 안팎이 시끌시끌했다. 36년간 참혹하고 잔인한 만행을 저질러놓고 그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그 역사 자체를 부인하고 뒤집어보려는 그 얄팍한 일본인들.
나는 다시 상인들과 4월 16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400여명이 참여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규탄집회'를 개최하고 그 성명서를 주한 일본대사관 2등 서기관에게 전달하면서 대사를 통해 일왕에게 꼭 전하라고 했다.
탑골공원 앞 집회는 점포 하나 없이 5일장에서 노점상을 하는 가장 밑바닥 서민들의 외침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일본열도를 깜짝 놀라게 해 스스로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폐기하도록 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또, 정치인들에게 우리같은 서민도 일어나고 있는데 당신들은 무얼 하고 있느냐는 채찍질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국내 5大 일간지의 어느 한 곳에도 기사 한 줄 나지 않았다.

2001년 세계 디자인 박람회가 개최되는 것과 발 맞추어 모란시장이 성남시 관광벨트로 조성되어, 숙원이던 민속공연장을 건립해 8월에 개관했다. 모란장을 찾는 고객에게 민속공연 등 다양한 볼거리와 고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개발했다. 국내는 물론 외국관광객까지 유치할 수 있는 관광자원화의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모든 것이 모란장의 상인 한 사람으로서 전문 지식도 없이 오직 상인들의 심부름꾼 역할을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에서 이루어낸 결실이라 부족하면서도 더욱 보람 있는 일로 기억된다.

고마운 아내와 아이들
아내는 지난 7년간 화물자동차를 직접 운전하며 지방 5일장을 보러다니면서 주부로, 아내로, 엄마로, 장사꾼으로, 운전 중에는 기사로 1인 5역을 혼자 감내하다가 결국 디스크 증세로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나의 상인회 무보수 상근직의 심부름꾼으로서 대내외적인 활동은 이런 아내가 있기에 가능했다.
끝으로 대학 4년짜리 큰놈은 군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 4년을 마치고 내년 2월이면 임관한다. 쓰러져 가는 셋방 집에 여자 친구를 스스럼없이 데리고 와 인사를 시키는 그 맑고 맑은 마음에서 나는 더 없는 행복을 느낀다.
둘째 놈과 셋째 딸도 모란장에 종종 나와 한참 강아지 파느라 정신없는 우리에게 "제 친구예요! 야 너희들 인사드려, 우리 엄마 아빠야"하며 환하게 웃는다.
어느날 엄마가 하루 종일 손님과 입씨름하느라 파김치가 되어 있을 때 모란장을 찾은 둘째 놈이 한술 더 떠서 "엄마 제가 학교 그만두고 개장사 도와드릴까요? 개 사세요, 강아지 사세요!" 손님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치면서 엄마보다 더 잘 팔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린다.

혹 실직했거나 사업 실패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술주정뱅이가 되어 가는 한국의 사내들이여! 이 글을 읽고 모란장에 나와서 강아지 장사라도 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생긴다면 연락주기 바란다.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겠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전성배 성남모란민속시장 상인회장, 애완견 전문
{나의 삶 나의 보람} 중에서 2001.8.22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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